< 로체스터 8월 풍경 > (한국 여정)

한국에 다녀왔다. 가자마자 건강검진 및 치과진료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 팔순 잔치를 치르느라 많이 바빴다. 여의도 “운산”에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보며 귀한 시간을 가졌다. 큰 이모(목사)의 말씀에 이어 장남인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었다. “감사하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목사가 정작 어릴 적 그토록 사랑으로 곁을 지켜주셨던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았는데, 이 기회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진심으로 전해보았다.

다음 주에는 아버지와 함께 강남성심병원에서 지냈다. 얼마 전, 위에서 선종이 발견되었고 마침 이 주간에 선종 제거 시술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긴 나흘을 입원하셨다. 내가 아버지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한국은 보호자가 한 명 꼭 있어야 하는데, 한 번 들어가면 퇴원할 때까지 나올 수 없기에, 아버지는 “혼자 있어도 된다”며 고집을 부리셨다. 시중들 일이 하나도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우겨서, 내가 이틀, 동생이 하루를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시키시는지(^^), 보호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싶을 정도였다. 좋았다는 말이다. 언제 아버지랑 이렇게 단 둘이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시중도 들어보겠는가!

그 다음 주에는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했다. 막내이모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우리 가족을 섬겨주었다. 덕분에 아버지 어머니와 수영도 해보고, 대구와 부산도 가보고…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중간 중간 일정이 비는 날에는 제일교회 졸업생들을 만났다. 민환/소윤 부부, 제흥/선영 부부, 태준/찬미 부부! 여느 청년들보다 열심히 섬겼던 이들이었기에 만남의 기쁨은 더 컸다. 아기 낳고 기르면서도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우리 내외를 위로하심도 느꼈다. 매년 (한국에 돌아가서도) 달력을 만들어주는 (최)지혜와 현열이도 만나기로 했었는데, 아버지 수술 일정으로 아쉽게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사실 만나고 싶은 청년들이나 지인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모두 만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페북에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살짝 올린다. 그 사진들을 보고 연락 오는 지인들이 있으면 그들과는 만나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두 바쁜지(^^;) 따로 연락 온 이들은 없었다. 그래도 위의 세 커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 머물렀던 넉 주 중, 두 주는 어머니(=목사) 교회에서 설교했고, 한 번은 아내 친구가 고려대학 구로병원 원목인데, 예닐곱 명의 환우들과 가족들 앞에서 설교했다.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었던 예배였다. 나머지 한 주는 내가 미국 오기 전 8년간 목회하던 신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국 갈 때마다 담임목사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주중에 방문하여 옛 교우들을 만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20여명의 성도들을 21년 만에 예배당에서 다시 보니, 눈물이 날 뻔했다. 26살 나이에 멋모르고 시작한 목회지라 그랬는지 더 고향에 간 느낌이었다. 어린 목회자를 잘 따라주며 신앙생활을 이어가셨던 고마운 분들… 뒤늦게 기적적으로 파주에서 만난 낙은이, 신외리 출신으로 사모가 된 하나와 정희 사모 가족을 만난 것도 너무 감사했다.

동생네 가족들과의 재회와 아내의 온 가족들과 만난 것도 너무 좋았고, 병환 중에 계신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진화/진휘/진남)을 춘천에서 만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여의도 고등학교 12회 동창들 다섯 명과 만난 것도 좋았고, 감신대 농구부 케리그마 동기들과 후배들을 만난 시간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랜 동역자인 박주환 목사네와 보낸 시간도 너무 좋았다. 내 첫 주례 부부 박주환/한미선! 이번에 받은 사랑을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할 듯하다. 프로야구 한화 외국인 스카우터로 활동 중인 승환이 덕분에 가족들과 포수 바로 뒤쪽 테이블 특별석에서 LG와 한화 경기를 본 것도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장모님 산소에 가서 간단히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온 것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좀 더 기다려 주셨으면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품에 안아 주고 계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아내에게는 더 보고 싶은 엄마였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을 것 같다.

특별히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아버지가 크레딧 카드를 주셔서 그것으로 지불했다. 아버지가 계속 카드를 주시기에, 내가 진지하게 거절했다. “그러지 마시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이렇게 너희에게 사주는 것이 특히 조이에게 맛있는 것 사주는 것이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너희가 바빠서 자주 못나오니… 다음 구순 때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아빠가 하게 해줘!”

고국을 떠나 미국 목회를 한지가 올해로 21년째이다. 청년들 주례를 서기 위해 5일간 두 번 다녀온 것 빼고는, 그동안 아버지 칠순, (어머니 칠순 때는 미국에 오셨던 것 같고) 아버지 팔순 그리고 이번에 어머니 팔순 때를 빼고는 나간 적이 없는 것 같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제 5년 후 아버지 구순 때 나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사주는 것일지 모른다”며 아들 내외와 손녀를 위해 카드를 건네시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로체스터에 자정 즈음에 도착했는데 아버지가 보이스톡을 네 번이나 남기셨다. 공항에서 카톡으로 도착 소식은 드렸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뒤늦게 통화를 하니 “잘 도착했냐”, “피곤하진 않냐”, “얼른 자라”, “이번에 고마웠다”며 일반적인 말들을 건네셨다. 전화를 끊은 후 정확히 1분 후 또 전화가 왔다. 아버지 왈 “엄마가 샤워하느라 아들 목소리를 못 들었다고 전화해 달란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본인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일찍 끊으신다. “뭐하니?” 물으시기에, “이제 렌터카 반납하러 가야해요”라고 답했더니, “그래그래 얼른 자라”(^^) 하시며 전화를 또 끊으시려 하기에, 잠시 멈춰 세우고는 “이번에 너무 좋았어요”라고, “많이 감사했다”라고 말씀드렸다. 바로 어제까지 들으셨던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으셨단다.

이번에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아내 덕분에 부모님을 모시고 예쁜 음식점과 카페에 함께 갈 수 있었다. 구들장 의왕 오리백숙, 그 옆 코코테로 장인이 운영하는 빵집 카페, 안양 마벨리에 뷔페, 남산타워 투어, 그리고 어머니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영화도 세 편이나 봤다. 다른 것보다 이 시간들이 너무 좋으셨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두 분이서만 이런 곳을 찾아갈 수도 없고, 한국 생활은 모두 바빠서 데리고 가 줄 사람도 없었는데, 이번에 여러 군데 “함께” 가게 되어 너무 좋으셨다는 것이다.

부모는 효도할 때까지 기다려주시지 않는다고 하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또 언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더 살갑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내 덕을 많이 봤는데, 다음에 가게 되면 그때야말로 다시 볼 수 있는 기약이 언제 있을지 모르겠기에, 내가 좀 더 말도 많이 걸고, 내가 손도 더 잡아드리고, 맛있는 곳 예쁜 곳에도 많이 모시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 구순인 5년 후가 아닌 그 전에 다시 뵐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